선불교와 정신분석

거울 속의 거울, 경계 지우기

고요나무 2023. 4. 25. 10:03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pp. 108-130
 
<본능과 그 변화> 중
 
발제 : 2023/04/08 하정혜

 
 
 
 
개인적으로, 프로이트 해설서가 아닌 그의 원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펼쳐지는 여러 ‘가설(아마도 경험과 직관에 따라 도출한)’에 의지하여 이론을 전개해나가고 있음을 곳곳에서 밝혀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이러한 가정과 가설의 총체라 한다면, 그의 이론의 모든 세부사항들이 현대과학에 편입되기 위한 근거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활동의 구조를 밝혀내려는 단 하나의 목표에 평생 동안 집중하여 천착했다. 그 결과물로 현재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그의 저작에서 <본능과 그변화>를 다룬 논문의 중후반부를 살펴보려고 한다. 개인적인 독해의 결과, 부분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동의되지 않는 부분은 굳이 언급하지 않고, 프로이트에 대한 독해에 더불어 새로운 가설의 설정을 시도하고자 한다.
 
 
프로이트, 그 절반의 독해
 
나는 원초적인 본능들을 <자아 본능> 혹은 <자기 보존 본능>과 <성적 본능>, 이렇게 두 그룹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제의한 바 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정신분석의 발달 과정 중에 설정된 이 가설이 처음 적용된 것은 정신 신경증,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전이 신경증>군에 속하는 신경증(히스테리와 강박신경증)에 대한 정신분석에서였다. 왜냐하면 그런 신경증들의 경우, 그 질병의 밑바닥에 성적인 요구와 자아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_p.108
 
우리가 본능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정신 장애에 관한 정신분석적 연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지금까지의 발달 과정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정보를 제공한 것은 단지 <성적 본능>에 관한 것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정신 신경증의 경우 성적 본능만을 따로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_p.110 (인용문 부분 중략)
 
 
프로이트가 주목한 신경증자에서 성적 본능은 ‘관찰 가능한 증상’으로 표출된다. 따로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 가능한 증상으로서의 성적 본능은 ‘선택적으로’ 본능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표자 역할은 일차적으로 신경증자를 주된 대상으로 하는 정신분석이라는 치료법, 즉 프로이트에게 주어진 특정한 연구 환경에서 기인하였다. 또한 그의 말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성적 본능을 지칭할 때에 ‘관찰 가능한’ 종류의 본능에 한하여 논의하게 되는 논리적 구조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성적 본능에 대한 논의 바깥에 ‘관찰과 측정이 불가능한’ 종류의 본능을 상정할 수 있다. 나아가 <성적 본능>은 본능의 대표자로서, 관찰 불가한 또 다른 본능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때 <성적 본능>의 출현은 만족되어야 할 본능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 본능은 자기 보존 본능인가
 
같은 맥락에서, 관찰 가능한 종류의 본능의 하나로 <자기 보존 본능>을 지칭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이를 <자아 본능>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계속해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프로이트가 정립한 이드-초자아-자아의 개념에서 말하는 자아인 것인지, 자기 보존 본능을 지닌 원초적 존재로서 자아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인지 혼동된다.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이 (자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드와 초자아와의 관계성에 대한 중요도와 함께) <무의식> 개념과 더불어 현대 심리학의 토대인 기초용어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기 보존 본능>과 <자아본능>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이 혼용에서 원초적인 <자기 보존 본능>을 말하는 <자아 본능>일 때와 다르게, ‘자아’로서의 본능을 말하려고 한 무의식의 의도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이 경우는 정확히 우리가 아는 ‘자아’의 개념이 이 <자아 본능>의 개념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드가 아닌 한 자아는 어떻게 <자아 본능>일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관찰 불가능한 본능’의 지칭으로서 <자기 확인 본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본능은 그 자체로 관찰 불가능하기도 하고(성적본능에 부착되어 나타나지 않는 한), 또한 ‘관찰 불가능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를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이 내재된 욕구’라는 측면이 있다.
 
 
성적 본능이 추구하는 목표는 <신체 기관을 통한 쾌감>이다. 성적 본능은 처음에는 자기 보존 본능에 부가된 본능으로 출현하다가 점차 독립적으로 분리된다. 대상 선택에서도 성적 본능은 자아 본능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간다. 성적 본능의 일부는 자아 본능과 결합된 상태로 있으면서 자아 본능에 리비도적 요소들을 제공한다. 성적 본능은 그 대상을 얼마나 쉽게 대체할 수 있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바로 이 특성들 때문에 성적 본능은 원래의 목적을 위한 행동과는 아주 동떨어진 기능, 즉 <승화>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_p.111
 
 
 
성적 본능의 비성적 기능, 리비도
 
프로이트가 <자기 확인 충동으로서의 본능>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일단은 여기서의 자아 본능은 자기 보존 본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능의 변화에 대한 이 논문에서 프로이트가 승화의 기능을 일회적이나마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성적 본능이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한 행동과는 동떨어진 기능 또한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성적 만족이 아닌 기능으로, 우선 자아 본능(자기 보존 본능)에 리비도적 요소를 제공하는 기능이 있다. 성적 본능은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요소로서 기능할 뿐 아니라, ‘리비도’의 전달을 일으키는 리비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비도적 기능으로 인해 성적본능은 다른 형태의 만족으로의 변형이라는 승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 또한 성적만족이 아닌 기능이다.
 
성적 본능이 가진 이러한 특성을 ‘리비도’라는 명칭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때 리비도란 특정한 대상, 특정한 만족으로 한정되지 않는 에너지의 본체로 볼 수 있다. (일차적이고 표층적으로) 성적 목적에 귀속될 때에는 성적인 만족을 가져온다. 하지만,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대체하여 구현될 때에는 성적 본능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완전히 다른 만족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도 성적 본능이라는 명칭을 유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적 본능의 리비도적 기능에 의한 변환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성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지 않기에 비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비성적인 에너지로써 실현된 것을 성적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게 되면 그 변화의 과정과 결과를 축소하여 평가하고 성적인 측면만을 과도하게 이상화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적 본능의 리비도적 기능에 의해 승화된 이후의 만족에 대해서는 만족의 목적이 다른 한, 명확히 비성적 특질로서 구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리비도는 ‘추동하는 압력’ 그 자체로 있으면서 존재에 어떤 목적성이 설정되었을 때 (성적 본능이든, 자기 보존 본능이든 만족을 요구하는) 그 방향으로 존재를 끌어당기는 장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리비도는 그 어떤 목적도 없이 ‘텅 빈 채로’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존재는 차체이고 리비도는 차체의 일부인 연료공급장치(이면서 그 작동)이고, 본능은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본능에 부착되느냐에 따라 어떤 만족에 도착하는지가 달라지며, 리비도는 차체를 작동시키는 근본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실존적이다. 도로는 비포장일 수도 있고 고속도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완전한 오프로드일 수도 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거울 속의 거울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 보자. 프로이트는 본능의 변화로써의 승화를 일단은 논외로 한 채, 성적 본능의 성적 만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방향 전환에 따른 본능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서 전개해 나간다.
 
관찰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본능이 다음과 같은 변천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대 방향으로의 전환
주체 자신으로의 방향 전환
억압
승화
 
본능이 변형되지 않은 형태로 전개되는 것에 대항하여 작용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본능의 변천 과정, 즉 본능의 운명을 본능에 대항하는 방어 과정의 양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 방향으로의 전환>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과정, 즉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의 변화>와 <내용상의 변화>를 보다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의 변화>의 예는 서로 상반된 대립 개념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대립쌍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사디즘과 마조히즘, 그리고 관음증과 노출증이 그것이다. 이 경우의 방향 전환은 능동적인 목적(괴롭히거나 들여다보려는 목적)이 수동적인 목적(괴롭힘을 당하거나 관찰당하는 목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내용>의 전환은 단 한 가지의 경우, 즉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체 자신으로의 방향 전환>은 마조히즘이 실제로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진 사디즘이고, 노출증이 바로 자기 자신의 신체를 관조하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조히즘의 경우 수동적인 자아가 실제로는 외부의 다른 주체가 떠맡은 자신의 최초 역할을 스스로가 다시 수행한다는 환상 속에 빠짐으로써 본능의 만족 또한 원래의 사디즘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신분석을 통해 보면 고통을 가하는 것이 사디즘 본능의 원래 목적은 아니다. 사디즘에서 주체가 고통받는 다른 대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자학적으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된다. 물론 두 경우 모두 해당 주체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과 함께 오는 성적 흥분을 즐기는 것이다. 사디즘은 애초부터 외부의 대상을 향한 것이다. 초기에 본능이 보이는 능동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나중에 나타나는 수동성과 병존한다._p.111-117
 
사디즘적 성향은 대상이 느끼는 고통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성적 흥분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본능의 추구일 수 있다. 이러한 목적(마조히즘적인 것)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으면서, 사디즘적 위치는 쉽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의 고통을 통한 성적 흥분이 아닌, 대상의 고통과 쾌락에 대한 동일시적 만족인 측면에서 사디즘의 만족은 (주체자신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대상의 변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마조히즘적 성향은 사디즘적 본능에서 변화된 양태이면서 그 자체로 고통에서 성적흥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디즘이라는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의 목적 변화와, 자기자신으로의 변환이라는 대상 변환이 동시에 일어났기에 마조히즘적 본능은 사디즘적 행위자에 대한 동일시이며, 이후 마조히즘적 주체는 본격적인 사디즘으로 이행되어 갈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가학적 만족을 내포하기에 자기가학적 경험을 외부의 대상으로 재변환하거나, 본래의 가학적 만족을 드러내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가학 성향으로 변화될 여지가 있다.
 
이 경우 가학적 위치와 피학적 위치를 별개의 만족으로 향유하려는 이중적 성향의 도출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고 있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병존은 최종단계로의 발달 과정의 일부로 표현되지만, 최종단계로서의 특성 또한 추론할 수 있다. 즉 능동성에서 전환된 수동성과 주체 자신으로의 변환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마조히즘에서는 본래의 사디즘적 요소에서 대상의 변환 과정에 재차 변환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미해결 지점은 고통이 (다른 불쾌한 감각과 마찬가지로) <성적 흥분을 일으키면서> 쾌락의 조건을 마련하게 된다는 전제이다. 자극이 불러오는 불쾌를 감소하기 위해 (자체적 진통기능으로) 쾌락으로 이행되는지, 흥분이라는 측면에서 불쾌-쾌락은 동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극에 의해 불쾌-쾌락이 동시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프로이트 또한 이런 면 때문에 ‘양가감정이란 말로 본능의 특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듯하다.
 
다른 한 가지는 신체적(또는 정신적일 수 있는) 고통을 유발하는 자극에 의한 흥분을 ‘성적 흥분’으로 지칭하고 있는 부분의 문제다. 고통은 어떻게 성적인 만족에 결부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도 프로이트의 연구가 성적 본능에 국한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에 고통의 성적 향유라는 측면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모든 고통이 성적 흥분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현재로서는 이 부분은 그의 논문의 핵심주제에서 벗어나 있기에 제외하기로 한다.
 
프로이트는 이 논문에서 방향의 전환이라는 상대적 개념을 적용해서 본능의 대립쌍들을 설명하려 시도한다. 이 전개는 거울 속의 거울을 떠올리게 한다. 가학증자는 자신의 거울로서 피학증자를 바라보며 만족을 얻고, 피학증자 또한 거울작용을 통해 대상의 위치로 이동해 쾌락을 취한다. 거울 속에 거울이 있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거울에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없다.



 
 
본능, 경계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그렇다면 경계를 지움으로써 얻어지는 만족이라는 측면에서, 주체는 왜 이러한 방식으로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프로이트가 명시적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의 내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만일 우리의 정신생활 전체가 <세 종류의 대립항>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하다 보면, 우리는 어쩌면 사랑을 둘러싼 여러 대립쌍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세 종류의 대립항>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주체(자아) - 객체(대상, 외부 세계)
쾌락 – 불쾌
능동성 – 수동성
 
정신적 삶의 초기 단계부터 원래 자아는 본능을 안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는 스스로가 그 본능을 만족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이 시기 동안 자아(주체)는 쾌락과 일치하게 되고, 외부 세계는 무관심(달리 말하면 자극의 근원으로서의 불쾌)과 일치하게 된다. 자아에게 제시된 대상들이 쾌락의 근원이 되는 한, 자아는 그 대상들을 받아들인다. 반면에 내부에 있는 것이 불쾌의 원인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밖으로 내보내게 된다. 즉 자아(주체)는 쾌락과 일치하게 되고, 외부 세계는 불쾌(이전에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와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 쾌락의 근원으로 판명이 나면, 그 대상은 사랑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자아 속에 편입된다. 순수한 쾌락자아로서는 다시 한번 대상이란 외부에 존재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일이 당연한 것이다. 대상과 관련된 것으로서의 증오는 사랑보다 먼저 발생한 것이다. 자극을 쏟아붓듯 발산하는 외부 세계를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원초적으로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미움은 생겨난다.
 
프로이트는 본능의 변천 과정이 자아의 나르시시즘 형성과정을 따르고 있다고 보며 그 근거로서 ‘쾌락자아’ 개념을 말하고 있다. 쾌락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자아는 쾌락만을 내부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쾌는 내부로 인정되지 않고 외부가 되는 구분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대상이 쾌락으로 승인되면 내부로 편입되어 내부와 외부는 자아 속에서 순수한 쾌락이라는 동질성을 획득하게 된다. 반대로 내부에 있는 것이 불쾌의 원인이 될 때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작용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쾌락자아는 내부를 쾌락으로, 외부를 불쾌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기에,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미움의 대상이 되는 구조 또한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프로이트는 대상에 대한 사랑 이전에 대상이라는 외부적 구조로 인해 미움이 먼저 발생한다고 본다. 외부에 있음이라는 조건 자체가 미움의 원인인 것이다. 미움의 대상은 내부에서 불쾌의 원인이 되었기에 추방되었던 어떤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처럼 쾌락자아가 내부와 외부에 쾌락과 불쾌를 분리하여 저장하는 속성을 갖기에 본능은 초자아에 의해, 혹은 자극의 초과로 인해 불쾌로 판정되는 순간 외부세계로 돌출된다. 그것이 프로이트가 본능의 변화에 대한 논의에서 마조히즘의 근원은 사디즘이며, 사디즘은 마조히즘을 내포한다고 설명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매혹과 혐오 사이
 
이번 독해에서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프로이트의 가설이 전제하고 있는 성적 본능의 관찰 가능성에 대비되는 관찰 불가능한 본능의 한 예로 <자기 확인 본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관찰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찰 가능한 본능과 함께 나타난다.
 
둘째, 성적 본능은 성적 목적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 대체되거나 다른 본능에 부가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으로부터, 성적 본능의 기저에서 작동하는 리비도의 비성적 특질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리비도의 작동을 가장 쉽게 획득하는 것이 성적 본능일 수 있으나, 리비도와 성적 본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셋째, 가학-피학의 대립쌍에서 발견되는, 방향을 바꾼 본능의 모습은 쾌락원리에 의해 외부로 추방된 (원래 내부였던) 불쾌를 쾌락으로 취한다는 점에서, 쾌락자아가 만들어낸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의해 쾌락에의 향유는 전제되지만, 실제의 만족은 그 경계의 소멸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계의 생성과 소멸이 쾌락의 발생과 목적 달성에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혹되는 것과 혐오하는 것의 차이는 주체가 내부에 두기를 (지속하기를) 원하는가, 거부하는가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외부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외부인 것인가?
다만 내부에서 반전된 거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