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pp. 194-214
「무의식에 관하여」中
발제 : 2023/05/12 하정혜
무의식 조직과 전의식 조직
프로이트에 의하면, 무의식 조직은 휴지休止 상태에 있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무의식 조직은 그 파생자를 통해 계속 존속되고, 전前의식 조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무의식 조직에 소속된 본능 충동의 파생자들은 의식 조직에서 획득한 모든 것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 조직의 형성체와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그렇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전의식 조직에 속한다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무의식 조직에 속하는 무의식의 파생자에는 신경증 환자의 환상 또는 정상인의 환상, 그리고 대체 형성물이 있다.
이 파생자들은 의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며, 전의식의 상당 부분은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의식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검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프로이트는 검열이 무의식 조직과 전의식 조직 사이에도 위치해 있고, 전의식 조직과 의식 조직 사이에도 어떤 검열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프로이트는 또한, 전의식 조직에서 의식화의 행위는 특정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주의主意(개체 내의 여러 자극 가운데서 특정한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거나 그것에만 반응하는 정신의 집중적인 작용)’ 기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표명한다. 이때 의식화는 단순한 지각 작용이 아닌 (전의식 조직과 의식 조직 사이의 검열을 통과할 만한 수준의) ‘리비도 과잉 집중’이기도 하다.
「무의식에 관하여」를 여기까지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등장하여 자극을 주는 단어는 바로 ‘주의’이다. 주석에서는 ‘특정한 자극을 인정하거나 그것에만 반응하는 집중 작용’이라고 해설되어 있다. 일상에서 ‘주의를 기울이다’, ‘주의가 산만하다’라고 할 때 주로 쓰이는 단어인 주의가, 무의식의 파생자가 전의식에 들어있으면서 의식화의 행위로 이행되게끔 할 수 있는, 넓은 의미에서 ‘무의식에 대하여 작용하는’ 어떤 것이라는 이 개념은 무의식에 관한 논의에서는 일견 새로운 것이다.
주의의 기능이 단순히 의식 조직에서 일어나는 지각 작용의 한 양태가 아니라, 전의식 조직에서 무의식의 파생자를 의식으로 돌출시킬 수 있는 ‘리비도 집중’과도 관련되어 있는 어떤 정신 작용인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관점은 주목할 만하다.
무의식은 열려 있다
이어지는 텍스트에는 서로 다른 함의의 두 개의 문장이 연이어 따라오고 있다. 이 또한 무의식 조직에 대한 프로이트의, 결정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두 문장의 내용을 보자.
정상적으로는 지각에서 무의식 조직으로 이어지는 모든 통로가 열려 있으나, 무의식 조직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직으로 향하는 통로들은 억압에 의해 폐쇄되어 있다.
어느 한 사람의 무의식 조직이 의식 조직을 거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무의식 조직에 대해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 _p.200
첫 번째 문장은 반론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그 앞부분에 대하여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의식에서 무의식을 향해 이루어지는 자극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그것이 항상 열려 있다는 사실 자체는 지금까지 크게 중요한 것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기에 다소 낯선 어떤 말로 들리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무의식으로 진입하는 통로는 언제나 ‘열려’ 있다. 그것의 출구가 폐쇄되어 있다는 사실, 즉 검열 또는 억압에 의해 무의식으로부터의 반출이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주목효과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이는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지각한계를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어떤 자극도 실시간으로 무의식에 입력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무의식 조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말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의 일면에는 이러한 ‘실시간’, ‘무제한’ 입력작용에 대한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운 탐색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실시간으로 무수한 정보가 새롭게 생성되어 유통되고 있는 온라인 세계가 떠오른다. 이 세계에서 특정한 정보를 건져 올리는 것은 특정 단어의 검색 행위라면, 이것은 앞에서 말한 ‘주의’의 작용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튼 이 지점에서, 무의식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 모든 자극을 저장하고 보관하며, 반대방향에 대해서는 폐쇄성이 높은 무의식에서 그 저장내용들은 어떤 체계에 의해 출력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선 본문에 적시된 ‘무의식으로의 모든 통로(입구)가 열려 있다’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기억해 두기로 하자.
정신분열증의 사례들로부터
두 번째 문장은 더욱 낯설다. 어떤 사람의 무의식 조직이 의식의 검열 없이 다른 사람의 무의식 조직을 감지하고 반응하며 교류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금 프로이트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단 한 개의 문장만으로 더 이상의 부연이나 문제 제기 없이 제시된 이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욱이 두 개의 문장이 서로 이어져 있는 이 상황에서 심지어 두 문장 사이에는 어떤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마치 타자기로 작성한 논문 원고의 한 페이지가 완전히 누락되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혹시 뒤쪽의 어떤 페이지가 실은 이 두 문장 사이에 위치했어야 할 내용이었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자면 뒤쪽에서 정신분열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몇 개의 사례들에 관한 내용 말이다.
비록 그 순서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위의 두 개의 문장과 이 논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정신분열증에 대한 탐구를 관련지어 사고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없다. 프로이트 자신이 직접 “아마도 우리가 나르시시즘적 정신 신경증(정신분열증)이라 부르는 질병의 분석만이 이 수수께끼 같은 무의식 조직을 우리의 이해 범위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말하자면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p.202)”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서를 조금 바꾸어서 프로이트가 가져온 정신분열증의 사례를 우선 살펴보자. 아래는 빅토르 타우스크 박사가 관찰한 여성 정신분열증 환자가 애인과의 심한 말다툼 후 분석에서 말한 내용이다.
저는 그이를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볼 때마다 사람이 달라 보였어요. 그는 위선자이고, 눈이 비뚤어진 사람(독일어로 위선자, 사기꾼이란 비유적인 의미를 지님)이에요. 그 남자가 제 눈을 두 번씩이나 비뚤어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제 눈이 이렇게 비뚤어진 거에요. 이젠 제 눈이 아니에요. 이젠 제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단 말이에요. _p.205
여기서 이 여성은 ‘단어’로 표현된 상대의 특질, 즉 위선자라는 인식에 대하여 명백한 외부로,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여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에의 지각적 동일시를 넘어선 신체적 ‘동일화’로 이행되어 버린 자신을 호소하고 있다. 상대방이 위선자라는 ‘해석’으로부터 함축성을 띠게 된 이 ‘단어’는 되돌아와 자신의 ‘눈이 비뚤어지는’ 증상으로 신체화되며,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정신분열증의, 현실로부터 괴리된 비현실적 감각, 환각에 대한 비유일 수 있는) 원인으로서 작동하게 된다.
이 여성은 자신의 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어떤 ‘변화’를 (위치적으로) 경험했는지에 대해서도 발언한다. 이 발언은 또다른 물리적인 경험에 대한 발언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데, 교회에 서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밀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어떤 특정한 위치로 옮겨지는 느낌 속에 (본의 아니게) 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과 아래의 발언은 연결되어 분석될 수 있다.
그 사람은 그냥 보통 수준의 사람이었어요. 저는 본래 세련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저 역시 그렇게 보통 사람으로 만들어 놨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저에게 자기가 저보다 월등하게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저를 그 사람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지요. 이제 저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처럼 되어야 제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그 사람은 저에게 그 사람의 위치에 대한 거짓 인상을 심어 준 것이랍니다. 이제 저도 그 사람처럼 되었으니 (동일시에 의해), 그가 저를 잘못된 위치에 데려다 놓은 셈이지요. _p.205
프로이트는 여기서, 사고의 궤적이 신체의 신경 자극 전달과 관련된 요소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로 나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신경 자극 전달과 사고과정의 역동적 관련성을 보여준다. 정신분열증에서는 어떤 한 단어가 다른 단어들과의 많은 연관 관계 속에 전체 사고의 흐름을 대표하고 표현하는 위치에 오를 때까지 ‘단어들’에서 압축과 전위의 과정이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단어’의 우위이다. (라캉에서의 시니피앙의 우위, 상징계의 우위와도 같이)
추가적인 예로 제시된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 얼굴에 난 여드름의 분비물과 모공은 ‘튀어나오게 하는 것’, ‘구멍’으로서 연상되고, 발과 양말은 성기와 자위행위를 상징하게 되는데, 사실적으로 보기에 그 연관성이 타당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신분열증에서는 대체물로서 형성 가능하며, 신경증과 다른 기이함은 언어적인 연관 관계가 사실적인 (사물들 간의 유사성에 따른) 연관 관계보다 더 두드러져 나타나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때 사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은 포기되었다고 보이며, 대상을 대리할 수 있는 언어적 표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본다. 리비도 집중이 사물을 표상하지만 그것 자체를 포기한 채 사물을 대리하는 언어로 향한 상태가 정신분열증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관점을 1900년의 『꿈의 해석』에서도 이미 언급하고 있는데, “사고 과정, 즉 지각 행위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리비도 집중 행위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질도 없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으며, 그 과정들이 의식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은 언어적 지각의 잔재와의 연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p.211)”는 견해이다.

무의식의 사용법
무의식 영역의 리비도가 의식의 영역에 돌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언어적 요소’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프로이트의 이 초기적 견해는 로렌초 키에자에 의해 한 번 더 강조되고 있다.
프로이트에게서 표상적 대표들은 “표상들의 영역에서의 본능의 대리자들”이다. 본능들이 정신에 고정되는 것은 오로지 표상적 대표들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무의식에서 억압되는 것은 이런 것들이지 본능들이 아니다. 표상적 대표들은 또한 단적으로 무의식을 설립한다. (어떤 관념에 고착되는 것으로서) 프로이트는 그와 같은 고착을 기호로서의 표상적 대표의 무의식 안에서의 등록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이해한다. _로렌초 키에자, <주체성과 타자성-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중 3.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무의식의 탄생, p.205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무의식은 언어적 표상으로 구성된 세계이다. 이를 밝혀내는 병리적 증상이 정신분열증인 이유는 정신분열증의 리비도 집중이 의식과 전의식, 무의식 중 어느 층위에 머물고 있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 정신분열증에서는 대상에서 후퇴한 리비도 집중이 되돌아오기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의 상태에서 외부세계를 거부하고 자아에 리비도 집중이 과잉되며, 그 결과로써 최종적으로 현실에 대한 무감각 증세가 심화된다. 이때 정신분열증자가 경험하는 것은 환청이나 환시,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끊임없는 대화 등 명백한 ‘언어적 증상들’이다. (환시의 경우, 이미지는 궁극에서 언어인 이유로 그러하다.) 이 증상들은 언어적이기 때문에 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무의식이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것의 파생자를 전의식으로 내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정신분열증자에게서 발견하는 ‘언어적 증상’은 ‘무의식의 영역으로부터’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신분열증자의 리비도 집중은 무의식으로부터 파생된 어떤 종류의 ‘환상’이 (언어화된 형태의 환상이면서 망상적 수준에서) 전의식 조직에 머물면서 의식의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신경 자극 체계, 즉 신체적 단위에까지 직접적 영향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정도가 극렬하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자는 정상인 또는 신경증자와 구분되지만,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닌 경우에도 정신증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은, 환상 내지 망상을 구조화하는 틀인 ‘언어’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넘어 신체를 포함한 물질적 현실세계에 실체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한다. 즉 언어가 물질에 작동하게 하는 구조, 그것이 무의식의 ‘용법’인 것이다. 이때 무의식으로부터 송출된 언어적 표상의 정체는 ‘대타자’일 수 있다.
우리는 무의식에 대한 우리 담화를 이 담화가 언표하는 주장, 즉 무의식의 현전은 대타자의 자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모든 담화 속에서, 이 담화의 언표행위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 자체 속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_자크 라캉,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주제로 한 1960년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1964년 출판된 자료집 <무의식의 위치>, p.983
(여기서는 구조적 위상학이나 오이디푸스적 비유으로서의 위치가 아닌, 주체에 작용하는 어떤 ‘힘’으로서의 대타자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한에서) 언어로써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무의식의 현전이 대타자라면, 대타자의 언어는 타자의 것일까, 자신의 것일까? 타자로부터 기인하지만 결국 내부로써 작동하는 비非-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식을 대타자적인 것으로 인정할 때, 무의식에 관한 프로이트의 통찰에서 우리는 어떤 유익을 취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에게서 마치 어떤 결론이나 제언처럼 제시되는 문장이 있다. 다만 그 위치는 이 소논문의 중반 앞부분이다.
무의식의 충동이 전의식의 지배적인 성향의 어느 한 가지와 조화롭게 작용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억압이 제거되면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활동이 자아가 의도했던 활동을 더우 강화시켜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억압 과정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이 단 한 번의 협력 과정 속에서 무의식은 자아에 동조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협조 과정 속에서 무의식 조직이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_p.201
‘무의식의 대타자적 작동’을 ‘자아에 동조적으로 사용’하는 작업은 무의식의 충동이 전의식의 지배적인 성향의 일부와 조화롭게 작용하는 상황에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기에 그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두는 것으로 발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문제 제기되었던 “어느 한 사람의 무의식 조직이 의식 조직을 거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무의식 조직에 대해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은 아주 놀라운 사실이다.”라는 문장은 빅토르 타우스크 박사의 정신분열증 환자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무의식적인 동일화’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지 추정해 본다. 여성 환자가 의식하기 어려운 차원에서 스스로의 위치가 상대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처럼 느꼈던 현상은 보다 구체적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상상적으로 가정하자면 인간의 몸은 타인과 분리되어 있지만, 무의식은 연결되어 존재하며 필요에 따라 상호반응하면서 각자의, 혹은 전체의 삶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무의식의 동력인 리비도는 삶과 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근원의 신성神性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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