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와 정신분석

Let it flow

고요나무 2023. 6. 19. 17:28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pp. 284-304
「쾌락원칙을 넘어서」中
발제 : 2023/06/18 하정혜



반복, 사라진 기억의 재생품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억압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 있다. 그는 억압된 자료를 의사들이 말하듯이 과거에 속한 것으로 <기억하는> 대신, 그의 동시대적 경험으로서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재생품들은 항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것에서 파생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항상 전이의 영역 속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 속에서 활성화된다._p.286-287

억압된 것은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여기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반복된다. 반복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억압이 일어난 시점은 지나간 과거로 저 멀리에 있지 않고, 반복하는 자의 고통 속에 생생한 현재가 된다.
무언가 잘못된 어떤 것, 그것의 반복이라는 구조적 형식은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어느 정도 파악 가능하다. 물론 반복되는 구조는 그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 앞에서만 형상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도 쉽지는 않다. 정신분석 임상에서도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중요한 것은 그 너머에 있다. 알려고 해도 알아지지 않는 것, 앎의 영역 너머의 무엇이다.

프로이트는 위 문단에 앞서 정신분석이라는 ‘치료’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초기에 분석은 감추어진 무의식의 자료를 발견하고 합성하여 전달하는 해석의 예술이었는데, 해석은 해석일 뿐 해결이 아니었다. 다시, 분석은 기억으로부터 분석가가 구성한 사실을 내담자가 확인하게 하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목표로 삼게 된다. 이 또한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이 지점에서 분석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저항’이다. 억압된 것의 ‘전부’를 기억해낼 수 없게 하는 무엇, (분석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반복의 구조를 포함하여) 일부만을 기억해낼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때 분석가와 분석자 사이에 발생한 전이는 저항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 내담자가 재경험하게 되는 ‘잊혀진 삶의 일부’를 다루면서 분석가는 내담자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중립성을 잃지 않음으로써, 내담자에게 재생된 경험에 대한 ‘초연함’을 부여하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억압된 것은 분석을 통해 ‘다르게’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잊혀진 과거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치료적 성공으로 일컫는다. 프로이트적 ‘깨달음’의 실체는 무언가의 잔상이, 잊혀진 과거의 환영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잊혀진 과거’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일까. 잊혀지지 않은 과거는 기억되고, 잊혀진 과거는 반복된다면 이 ‘잊혀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 질문의 첫 번째 열쇠는 저항에 있다.


억압된 것의 반송

프로이트에 의하면, 저항은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저항이 ‘억압을 성취시켰던 것과 동일한, 의식의 상층부와 조직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가 아니라 <자아>와 <억압된 것>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저항의 위치는 보다 명확해진다.
“저항은 그의 자아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반복 강박이 억압된 무의식에서 생겨난다”는 문장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반복 강박이 억압으로부터,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어떤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저항은 자아의 편에서, (자아의 일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억압된 것의 억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힘이며, 반복 강박은 억압된 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무심히 (억압의 반대방향으로) 그것을 지속적으로 ‘반송’하고 있는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잊혀져 기억되지 않기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억압된 그것을,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일, 이것이 ‘잊혀진’ 과거가 반복강박을 통해 현재에 돌아오는 이유인 것은 아닐까. ‘있어야 할 곳’이란 어떤 의미인지 좀더 이야기해 보자. 억압된 그것은 억압이 일어난 때와 같은 이유로 저항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아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 바깥은 자아의 입장에서는 자아가 아니다. 자아의 외부인 (것으로 인식되는) 그곳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곳은 자아의 외부일 수 없다. 쾌락원칙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전 언급에서 확인했듯이, 자아는 자신의 쾌락적 동일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쾌를 외부로 내보내지만, 대상에게로 투사된 그것은 원래 자아의 일부였다. 따라서 자아에게 쾌락과 불쾌, 내부와 외부는 모두 자기 안에 있던 것이다. 다만 내부로 인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바깥으로, 무의식이라는 영역으로 내보내질 뿐이다.

자아의 많은 부분이 그 자체로 무의식이고 특히 자아의 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그렇다. (중략) 의식적, 무의식적 자아의 저항은 쾌락 원칙의 지배하에 운용된다. 그것은 억압된 것이 풀려서 생기게 되는 불쾌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억압된 것의 위력의 표시인 반복 강박이 쾌락 원칙과 연결되어 있는가?_p.288-289

반복 강박이 쾌락 원칙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유아기 나르시시즘적 상처의 발생과정이 분석상황에서 전이를 통해 어떻게 정교하게 반복 재생되는지를 상세히 이야기한다. 신경증 환자의 전이 현상뿐 아니라 정상인의 삶 속에서도 관찰되는 이러한 <반복>이 유아기 초기에 받은 영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정신분석학의 전제 또한 여러 사례를 들어 다시 강조한다.


구워진 껍질

프로이트에게 <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문제>인 반복강박은 “그것이 항상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동일한 경험의 반복 속에서 자기 표현을 하도록 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것처럼 보인다. 프로이트에게 반복강박은 쾌락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더 기초적이며 더 본능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 무엇이다. 쾌락-불쾌의 작동을 쾌락 원칙으로 명명했듯이 반복강박-저항의 작동을 반복 강박 원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다시 치료의 목적을 언급한다.

전이 현상은 억압을 집요하게 강요하는 가운데 자아가 유지하고 있는 저항에 의해 분명히 이용되고 있다.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반복 강박은 자아에 의해서 <자기> 편으로 끌어당겨진다(자아는 쾌락 원칙에 집착하므로)._p.293

프로이트는 저항이 전이를 이용한다고 말한다. 분석에서 저항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데에 전이의 목적이 있다고 앞서 말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저항은 전이를 이용하여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쾌락원칙에 의해 저항을 유지했던 자아는 이제 전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반복강박을 끌어들인다. 이 또한 자아의 쾌락원칙을 따르는 작업이다. 저항을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자아의 동일성, 항상성의 유지라는 쾌락에 유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분석은 반복이면서, 반복의 관찰이기도 하다. 운명의 반복적 상연 그 자체로부터 떨어져나와 부감으로써 그 반복을 관찰 내지 관조할 수 있게 된 자아에게, 억압된 것의 유지라는 저항 작업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게 되었을 수 있다.
혹은 자아 내부의 의식 영역의 역할에 대하여, ‘의식은 정신 과정의 보편적 속성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특수한 기능에 불과하다는 인상’에서 정신분석적 사색이 출발한다고 보는, 즉 자아의 의식 영역의 협소함에 대한 프로이트의 고민이 결부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프로이트는 의식이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기관 내부에서 일어나는 쾌락과 불쾌의 감정을 산출하는 정도로 그 기능을 한정 짓는다.

“<다른> 조직에서 발생하는 흥분 과정은 기억의 기초를 형성하는 영구적인 흔적들을 남긴다. 그 흔적들은 그들을 남게 한 과정이 의식화된 적이 없을 때 가장 강력하고 영속적일 경우가 많다.”는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의식’과 ‘기억의 흔적’은 동일 조직에 양립할 수 없다고 본다. 아예 <의식은 기억의 흔적 대신에 발생한다>라는 명제의 수립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때 의식에 포착된 흥분 과정은 의식화 현상 속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멸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외부세계를 향하고 있는 의식의 표면은 끊임없는 자극의 결과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켜 철저하게 <구워진> 껍질이 된다. 이 표면을 통과한 자극은 자극의 일부분, 작은 견본만을 내부로 침투시킬 수 있도록 자극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형성한다.
의식의 표층은 자극에 대항할 보호적 방패를 필요로 하기에 특별한 외피로서 무기체와 같은 성질을 띠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외부 세계의 에너지는 이제 의식의 외피를 통과하면서 자극의 강렬함이 축소된 일부만을 그 내부에 전달하게 된다. 이는 자극에 <대한 보호>가 자극<의 수용>보다 유기체에 더 중요하다는 자기 보존적인 쾌락원칙에 부합한다.


정지된 리비도 집중

<구워진> 껍질이라고 하는 의식의 외피로서의 표면을 설명하면서 프로이트는 리비도 집중에 관해 언급한다.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옮겨 가면서 흥분은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저항의 감소는 흥분의 영구적 흔적, 즉 어떤 촉진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의 조직 속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옮겨 가는 것에 대한 이런 종류의 저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정신적 조직의 요소에서 정지된(혹은 묶인) 리비도 집중 에너지와 움직이는 리비도 집중 에너지 사이의 차이에 대해 브로이어가 말한 문제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직 <의식>의 요소들은 어떠한 묶인 에너지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방출할 수 있는 에너지만을 갖고 있다._p.297-298

여기서 프로이트가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옮겨가면서’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의 이동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언급하게 될 ‘내부로부터의 흥분’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때 저항의 감소는 <흥분의 영구적 흔적>, 어떤 <촉진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의식에 억압된 흥분의 영구적 흔적이란 무엇인가를 촉진하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이 문장은 반복 강박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프로이트는 정지된(묶인) 리비도 집중과 움직이는 리비도 집중을 구분한다. 이 중 후자는 의식 영역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논리상으로는 무의식 영역의 일부 혹은 전체의 성격은 <정지된 리비도 집중>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어서 프로이트는 무의식 영역의 또다른 특질을 덧붙인다.

우리는 무의식적 정신과정이 그 자체로 <무시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은 우선 그 정신 과정이 시간적으로 질서화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도 그 과정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시간의 개념이 그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들은 부정적인 특징들인데, 이것은 <의식적> 정신과정과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반면에 시간에 관한 우리의 추상적 개념은 모두 조직<지각-의식>의 작업 방법에서 나오고, 또한 그 작업 방법의 지각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기능의 양식은 아마도 자극에 대한 방패를 제공하는 또 다른 방식을 구성할지도 모른다._p.300

무의식의 무시간성은 의식의 입장에서는 시간적 질서에 의해 순차적으로 첫 번째 반복, 두 번째 반복 등으로 동일한 무엇인가가 <반복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복 강박이,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그저 (계속해서) <거기에 정지해 (묶여) 있는 어떤 것>으로 말해질 수 있게 한다. ‘계속해서’라는 단어를 괄호 안에 넣은 이유는 무의식의 무시간성에 의거한다면 ‘계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입장에서만 말할 수 있는 우리는 어떤 것이 거기에 ‘계속해서’ 있다고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반복 강박은 그저 무의식에 무언가가 <묶여 있다>라는 표식 그 자체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무의식에 (억압되어) <묶여 있는> 무엇을 의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자아라는 현실의 일부>로서 의식의 현재에 펼쳐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무의식의 의식화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외상의 파열구

후에 <의식>의 조직으로 될 이 민감한 외피는 또한 <내부>에서 나오는 흥분을 받아들인다. 외부에 대해서 외피층은 자극으로부터 방어되고, 그것에 부딪치는 흥분의 양은 오로지 축소된 영향만을 끼칠 따름이다. 내부에 대해서는 그러한 방패가 있을 수 없다. 더 깊은 층에서 생성되는 흥분은, 그것의 어떤 특징들이 쾌락-불쾌와 관련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직접적으로 그리고 양의 감소 없이 그 조직에 전달된다.
이러한 사정은 두 가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쾌락과 불쾌의 감정이 모든 외부적 자극을 압도한다. 둘째, 너무 지나친 불쾌의 증가를 가져오는 내적 흥분을 다루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도입된다. 즉 그 흥분이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작용하는 것처럼 그것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병리 과정의 인과론에 큰 역할을 하는 <투사>의 근원이다._p.300-301

프로이트는 내부, 즉 무의식으로부터 돌출하는 흥분이 의식으로 진입할 때에 그것은 쾌락 또는 불쾌와 관련된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만 작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프로이트는 의식에서 산출되는 것이 외부 자극에 대한 지각, 그리고 쾌락-불쾌의 감정뿐이라고 말했다. 내부로부터의 흥분에 대하여 의식은 쾌락-불쾌, 즉, 좋다 혹은 싫다의 감정을 느끼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외부에서의 자극은 외피층에 의해 그 강렬함이 축소될 수 있지만 내적 흥분에 대하여서는 의식에 이러한 외피의 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을 밖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다.
내적 흥분의 지나친 강렬함은 애초에 의식으로부터 추방시키는 억압작업이 필요했던, 원래의 외부적 자극의 특수성에 있다. 그것은 “방어적 방패를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외부에서 오는 <외상적> 자극”이다. 외상, 즉 트라우마의 개념은 <구워진> 껍질에 어떤 파열구가 생긴 것이다. 이처럼 “방어망을 뚫고 들어온 자극의 양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것을 <묶어두는> 일이 필요해진다.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특수한 불쾌는 아마도 보호적 방패가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뚫린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주변 부위로부터 마음의 중추 기관으로 흥분이 계속 흐르게 되는데, 리비도 집중된 에너지가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어 그 갈라진 틈 주위에 고도로 리비도 집중된 에너지를 제공한다. 따라서 대규모의 <리비도 반대 집중>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위하여 다른 정신 조직들은 빈곤하게 된다. 그래서 나머지 정신 기능들은 심하게 마비되거나 축소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경우에서 고도의 리비도 집중 조직은 새로이 흘러들어 오는 에너지를 추가로 유입받을 수 있고 그것을 정지된 리비도 집중으로 바꾸는 일, 즉 그것을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_p.302


해리, 그리고 불안

프로이트가 말한 <정지된(묶인)> 리비도 집중은 무엇을 의미할까? “방출을 향해 압력을 가하면서 자유롭게 흐르는” 성질을 가진 리비도 집중을 정지된 리비도 집중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외상적 자극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되었다. 외상적 자극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특수한 불쾌’의 강렬한 경험으로 인해 의식에 파열구가 생기게 만드는 무엇이다. 이러한 외상적 사건에서 일어나곤 하는, 프로이트가 특정하지 않은 방어적 장치의 작동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주요증상이며 그 진단기준에도 포함되는 방어기제인 <해리(Dissosiation)>이다.
해리는 강렬한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어기제로, 흔히 기억장애, 다중인격이라는 증상으로 말해진다. 해리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자극에 대해 해당 기억 또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에서 소거하는 것인데, 때로는 자신의 자아의 일부를 특정한 인물에 대한 기억으로 대체하여 인격화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프로이트가 말한 의식화와 기억의 흔적의 양립 불가능성에 정확히 일치한다. 후자의 경우, 자아의 영역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진다는 관점에도 일치한다.

프로이트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한 용어들은 저항, 기억의 흔적, 쾌락원칙, 외상적 자극, 의식의 표층, 파열구, 정지된 리비도 집중 등이다. 이것들을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그 연결고리 끝에 해리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외상적 자극이 의식에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 그것은 의식으로부터 밀려나고 그 자극이 의식의 경로를 지나갔다는 사실에 대한 지각 이외에 의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기억의 상실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해리일 수 있다.
또한 자유롭게 흐르는 리비도 집중과는 달리 의식으로부터 분절시키기 위해 무의식에 묶여 정지해버린 리비도 집중은 무의식의 무시간성에 따라 지속적으로 의식의 영역이자 자아의 현실세계로, 그것을 있게 하는 반복 강박으로 드러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것은 쾌락원칙에 앞서고 우선하는 하나의 원칙으로 정립된다. 반복 강박 원칙에 따른 외상성 꿈의 반복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불안을 촉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안은 자극에 대해 준비시키는 사전단계로 기능하며, 불안이 유발하는 리비도 집중을 통해 자극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불안의 부재가 과거 외상적 사건에서 신경증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기에, 불안을 촉발하여 리비도 집중을 일으킴으로써 ‘다른’ 대응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Let it flow

강박은 말 그대로 ‘묶이는 것’이다. 어떤 힘에 의해 무언가의 움직임이 ‘묶이게’ 된다. 억압과 저항에 의해 리비도 집중의 자유로운 흐름이 묶인다. 그것은 묶여 버렸기 때문에 반복하게 된다. 반복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묶임’으로 인해서 (외상적 사건의 관계와 구조를) 반복하게 된다.
이 반복이 반송하는 것, 되돌아와 다시 경험해야 할 무엇은 외상적 기억의 정동(Affect)이다. 의식은 외상적 경험을 어떤 사실로 지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의 정동, 즉 정서와 감정은 당시로선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무의식으로 반출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묶인 리비도는 꿈 내지는 실제 현실이라는 스크린에 다시 상영되어 이전에 감당할 수 ‘없음’으로 밀어낸 것을 이제 감당해내도록, 불가능을 가능으로 변경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리된 나의 일부, 묶인 리비도 집중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의 전과정이 바로 그 여정이다. 분석은 고통의 원인과 고통 그 자체를 탐색하는 짧지 않은 시간이며, 또다른 의미의 flow 즉 몰입을 필요로 하는 시간이다. 몰입은 전이를 통해서 해리된 고통에 대면하게 한다. 분석은 고통에의 몰입이다. 몰입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방편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발제문을 준비하면서 떠오른 단어가 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 불교의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가 겹쳐진다. 묶여버린 고통(苦)이 있으며, 그것에의 몰입(集)이 있다. 고통의 온전한 경험은 소멸(滅)을 가져온다. 그 끝에 다시 자유롭게 흐르는 리비도(道)가 있다. 道, 즉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고통을 피하고 외면한 미성숙한 나에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나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_숫타니파타